Welcome to SungBong Mission​
주님의 품에 안기신 고 이성봉 목사님의 뜻을 이어받아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1965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 실천적 사명을 이어온 선교회입니다.
선봉선교회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죽도록 충성하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0)
목사님 소개
사랑을 전하는 목회자로 복음을 전하는 부흥사로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오늘날 너로‥‥‥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아멘."
목사님 생애와 사상
고 이성봉 목사님의 발자취는 주님께서 항상 동행하셨습니다.
성신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얻고 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행 1 : 8),
나의 갈 길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할 일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할 말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먹을 것조차 나는 알지 못한다.
목사님 자료실
SungBong Mission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회고록

결혼식 날의 전도설교

김동수(신촌성결교회 장로/한국도자기 회장)

1955년 3월 나는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 무시험으로 입학했다. 당시 고향인 청주에서 우리 김씨 집은 꽤 큰 집안이었고 집안 내에서는 처음으로 대학에 보내는 것이었다. 더구나 기독교 대학인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는 사실은 장로이신 나의 아버님에게는 큰 사건이었고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으며 자랑이었다.
아버님은 나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학교가 가까운 신촌에 하숙을 정해 주시고는 학문도 중요하지만 신앙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고 부흥사이신 이성봉 목사께서 신촌에 교회를 개척하였으니 꼭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신앙생활도 철저히 하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입학식을 끝내고 첫 주일 아침에 아버님이 적어주신 주소를 가지고 집을 찾아 나섰다.
내가 이성봉 목사님을 처음 뵌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인 것 같다. 당시 청주 서문교회에서 심령대부흥회가 열렸는데 은혜와 열기가 넘치고 교회 안 강대상까지는 물론 창밖에 서서 예배를 볼 정도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나도 자리가 없어 강대상 위로 올라가 쭈그리고 앉아 설교를 들었다. 휜칠한 키와 위엄이 주위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그 풍채는 굉장히 높아 보였고 재력도 대단할 것같이 보였다. 당시 아버님이 그 교회 재정 장로였기 때문에 목사님이 부흥회를 일주일 인도하면 드리는 사례금이 상당히 많은 금액이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게 수십년을 부흥회를 인도하셨으니 당연히 큰 대궐 같은 집에 살 것이라고 생각했고 설교 틈틈이 딸 자랑도 많이 했기 때문에 그 딸은 공주 같은 호화스런 모습일 것이라고 상상을 했다.

신촌 창천동에서 제일 큰 기와집만을 찾아 다녔으나 모두 허탕이었다.
주소대로 골목골목 찾아 들어가니 초라한 10평 남짓 되는 후생주택에 ‘이성봉’문패가 보였다. 의아하게 생각되었지만 문을 두드려보기로 했다. 어떤 초라한 아가씨가 나왔다. “혹시 이곳이 부흥사이신 이성봉 목사님 댁이 맞습니까?” 하고 물으니 “아, 청주에서 오신 김종호 장로님 아들이세요?” 하면서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나는 그 아가씨가 가정부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목사님께서 그렇게 자랑을 하시던 막내딸이었다. 그때 당시 정신여고 2학년인 꿈 많은 여학생이었고 훗날 나의 아내가 된 이의숙 권사였다. 이성봉 목사님은 10여평 되는 집에서 방 하나와 마루를 개척교회로 쓰셨다. 대여섯 평 되는 곳에 탁자 하나를 놓고 오기선 전도사가 설교했고 신도는 여자 10여 명과 남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하루는 방안을 들여다보니 이성봉 목사님 사모가 딸 둘을 데리고 감사, 감사하면서 식사기도를 하기에 밥상을 보니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국수 한 그릇과 소금뿐이었고 보리밥 한 사발과 김치를 놓고 진심으로 감사하는 모습에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내심으로는 너무나 놀랐다. 집이 너무 가난하였고 공주같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딸들은 옷을 맞춰서 입히지 않고 사모님이 무명 천으로 손수 지어 입히셨으니 볼품이 없을 수밖에 없어 가정부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많이 받는 사례금은 어디에 쓰시고 가족은 이렇게 가난하게 살도록 하시는 건지 나는 참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강사료로 받은 사례금은 모두 미자립 교회 지원, 신학생 지원, 고아원 등 어려운 곳에 쓰시고 집에는 최소한 연명할 식생활비만 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딸들은 교복 한번 맞춰 입고 검정구두 한번 신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또 한번 놀랐다. 목사님은 참으로 가난하고 청렴결백하게 사셨다.

배가례 전도사의 중매로 연애 반 중매 반으로 교제하던 중, 1960년 내가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에 경기여대 보육과를 졸업하고 유치원 선생을 하고 있던 이의숙(현재 신촌성결교회 권사)과 청주 서문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아버지가 충북의 유지였으므로 내 결혼식장에는 도지사, 시장,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수백 명의 청주 유지들이 참석해 있었다. 결혼식이 끝날 무렵 나의 아버님의 간단한 말씀에 이어 이성봉 목사께서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다 싶으셨는지 일장 설교를 놓치실 분이 아니었다. 하객들에게 인사하시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셨다. 오랜 시간의 설교 말씀에 신부는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날의 즉흥적인 설교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킨 훌륭한 설교였다.
이성봉 목사님은 자나깨나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오직 심령 구원에만 몰두하는 진정한 부흥사였다. 결혼 후 몇년 안되어 목사님의 회갑이 돌아왔다. 그러나 회갑날 어디를 가셨는지 행방이 묘연했다. 사위 둘과 딸들이 회갑 잔치를 해드리려고 사방으로 찾았는데 대전 애경원(나병환자 수용소)에서 집회를 하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딸만 셋을 두셨으므로 사위가 셋 있었는데 맏사위인 정승일 목사 내외는 미국 유학 중이었으므로 없었고 둘째 사위인 박일철 목사와 이원숙, 막내 사위인 나와 이의숙 그리고 처조카 몇 명과 같이 애경원을 찾아가 집회시 특송도 부르고 그 곳 나병환자 간부들과 인사도 하고 악수도 나누었다.
예배드리는 그들의 열기와 성령 충만에 우리 일행도 큰 은혜를 받았다. 난치병으로 얼굴이 찌그러들고 손가락이 뭉개지긴 했어도 박수를 치며 찬송을 부르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멀쩡한 사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신앙은 그들의 반도 못 되는 것이 미안했다. 그러나 그들이 차린 음식은 끝까지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까스로 양해를 얻어 목사님을 모시고 나와 조촐한 중국집에서 가족만의 회갑 잔치를 간결하게 치를 수 있었다.
지금도 그 당시의 감회를 잊을 수가 없다. 그는 평생을 그늘지고 버려진 곳이면 언제 어디든지 달려 가셨고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셨다. 유성에 있는 천양원(고아원)을 비롯한 많은 곳을 찾으시고 어린이들을 위해 설교하시며 틈틈이 오고 가는 길에 들르시어 물심 양면으로 도우셨다. 66세로 하나님 나라에 가시기 전가지 쉬지 않고 심령 구원에 애쓰셨고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예수님을 전파하시겠다고 온 몸과 맘을 주님께 다 바치셨다.

이성봉 목사님을 생각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이은실 사모다. 부흥목사의 내조자로서 그의 생활은 검소함과 절약 정신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설거지할 때 밥알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면 크게 꾸짖으셨다. 자투리 종이나 포장지 뒷면으로 편지 봉투를 만들어 가족들에게 나누어 쓰게 하셨고 철저하리 만큼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신 분이셨다. 그러나 돈이 생기면 본인을 위해 쓰시는 법이 없고 모두 가난한 사람과 불쌍한 사람을 위해 쓰시는 것은 목사님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셨는데 심지어 문 앞에 지나가는 사람도 붙들고 전도를 하셨다.
사모의 하루 일과는 성경읽기와 기도와 감사 생활의 연속이었다. 성경을 수십 번을 통독하심으로 모르는 구절이 없을 정도였다. 사위인 나의 건강과 사업을 위해 불철주야 기도하시는 것은 물론이고 나의 아이들 3남매를 어렸을 적부터 기도와 성경 가르침으로 일관하셨다.
오늘날의 내가 이만큼 사업에 성공하고 사람 대접을 받는 것은 모두가 사모님이면서 장모님이신 이은실 사모의 사랑과 기도의 결과라고 감히 확신한다. 몇 번을 강조해도 모자랄 만큼 그분의 생활은 오직 예수였고 감사 또 감사였다. 94세로 세상을 마치는 날 신촌교회 이정익 목사님과 이옥희 전도사님과 함께 임종을 지켰는데 아무 고통없이 천사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으로 가셨다.
청주 근교에 있는 선산에 나의 아버님 김종호 장로, 어머님 최순환 권사와 나란히 이성봉 목사님과 이은실 사모를 합장하여 모셨고 틈틈이 성묘를 하고 있다. 장충단교회 김원철 장로가 만들어 세운 묘비에는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라고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