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해 1965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 실천적 사명을 이어온 선교회입니다.
나의 갈 길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할 일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할 말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먹을 것조차 나는 알지 못한다.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이성봉 목사님 소개
한국의 무디, 빛의 사자 이성봉 목사
이성봉 목사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부흥사로서 한국의 무디라고 불리우는 인물이다. 말 그대로 그는 한국의 방방곡곡은 물론 만주와 일본, 미국에까지 전도 집회를 다녔고 그의 전도 집회에 참석하여 감동을 받아 크리스챤이 되었다는 사람들은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이들 중에는 유명 인사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특히 현재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는 수많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그의 설교를 통해 감동을 받고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부흥사였는가를 알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성봉 목사는 1900년 7월 4일 평남 강동군 간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부모님은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으나 그가 6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가 신앙 생활을 시작함으로써 복음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신천의 경신 소학교 교원으로 청빙 받을 만큼 신학문에 접해 있던 사람이었고 집사로서 신앙 생활에 열심이었던 까닭에 이성봉 목사는 자연스레 복음에 접하고 세상에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러나 가정 형편으로 인해 소학교만을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던 이성봉 목사는 이를 비탄하여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는 등 평탄하지만은 못한 성장기를 보냈다.
이러한 가운데 그의 신앙도 방황을 거듭하여 사춘기 시절에는 이성에 대한 흥미로 교회에 출석하는 정도였고 그나마 청년 시절에는 생업에만 급급하여 교회를 멀리하고 타락의 길을 걷기도 했다. 면학의 꿈이 사라진 후 공허한 삶을 돈벌이로 대치하며 살아간 것이다. 그러나 사명이 없었던 이러한 중에도 그에게 부흥사로서 대성할 만한 기질은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당시의 그로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지만 이미 그는 교인들의 칭찬을 받으며 강단에 서기도 하고 찬송을 부르는 등 남을 설득시키는데 남다른 면모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던 이성봉 목사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은 사도 바울이 겪은 것과 같은 사고를 겪고난 이 후이다. 1920년 6월 24일 주일에 과수원에서 과일을 싣고 평양으로 가던 중 가자묘 앞길에서 원인도 모르는 체 오른쪽 넓적다리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을 느끼고 쓰러진 것이다. 그는 3년 동안의 투병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였다. 이렇게 재출발한 이성봉 목사는 드디어 1925년 26세의 나이로 경성 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뜨거운 영적 신앙 단련과 사명의 무장을 이루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는 신학교 3년을 졸업한 이후 첫 사역지가 수원으로 결정되자 신풍리에 셋집을 얻어 교회를 개척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수원성결교회의 역사의 시작이 되었다.
그는 찬송을 은혜스럽게 부르면서 집회를 인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찬송은 뭇사람들의 마음을 열게하는 감동적인 것이었다. 이미 신학생 시절부터 어린이 부흥회를 인도하며 가는 곳마다 은혜스러운 역사를 경험한 그는 신학교 졸업반 시절 3일간의 금식 기도 중에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큰 소명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부흥사로서의 소명을 가지게 된 것이다. 신의주로부터 시작한 그의 부흥회는 양시, 안동, 비현 등지로까지 이어졌는데 그것이 성공적인 집회로 소문이 나서 그는 성결교회 뿐만 아니라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등에서까지 부흥회 청빙을 받게 되었다.
목회보다도 부흥회에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기 시작한 이성봉 목사는 1939년 교 단 총회시에 교단 소속 부흥강사로 임명받고 본격적인 부흥강사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국내는 물론 1939년부터는 일본 선교에도 힘썼고 1941년에는 만주 지방에까지 전도 여행을 다녔는데 이목사의 회갑 당시에는 그가 인도한 집회가 이미 천교회를 훨씬 넘을 정도였다. 해방 이후에는 폐허가 된 한국성결교회의 재건에 앞장서고, 한국 전쟁 이후 1954년 5월부터는 ‘임마누엘 특공대’라는 교단 희년기념 전도단을 이끌고 1년간 70여 지역을 전도하는 등 잠시도 쉬 지 않고 전도 활동을 펼쳤던 이성봉 목사는 1961년부터는 복음의 전파와 분열된 교단의 합동을 위하여 성결교단의 모든 교회를 순방하였다.
그가 1963년 2월 27일까지 480개 교회를 순방 집회한 후 1965년 7월 23일, 마침내 분열된 두 개의 성결 교단은 역사적인 합동 총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합동 총회에서 “주를 사랑하자”는 설교를 한 것을 마지막으로 이성봉 목사는 합동 총회를 마친 후 10일 만인 1965년 8월 2일, 66세를 일기로 40년간의 부흥강사의 생애를 마쳤다.
유족으로는 이은실사모와의 사이에서 4자매로 2째 여식은 일찍 천국에 갔고 딸 셋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