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SungBong Mission​
주님의 품에 안기신 고 이성봉 목사님의 뜻을 이어받아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1965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 실천적 사명을 이어온 선교회입니다.
선봉선교회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죽도록 충성하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0)
목사님 소개
사랑을 전하는 목회자로 복음을 전하는 부흥사로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오늘날 너로‥‥‥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아멘."
목사님 생애와 사상
고 이성봉 목사님의 발자취는 주님께서 항상 동행하셨습니다.
성신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얻고 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행 1 : 8),
나의 갈 길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할 일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할 말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먹을 것조차 나는 알지 못한다.

오직 주님께 바친 몸 그의 능력의 손에 붙잡혀 신앙생활 사십 년간에 부흥 사명이 임한 지 이십삼 년 동안 한국 각지로, 일본으로, 만주 등지로 전도 여행하며 지난 자취를 회고해 보면 신기하고 오묘하신 주님의 섭리와 경륜을 다 측량할 수 없었다.
목사님 자료실
Previous
Next
SungBong Mission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출판 자료

이성봉 목사님의 생애와 사역을 발표한 연구 및 논문 자료와 저작집/부흥운동/설교 자서전/만화/예화 등의 출판물과 자료들을 성봉선교회는 제공하고 있습니다.

부흥의 희망과 해석학적 현실이해(이성봉의 회개의 인식론과 은총의 존재론) – 황덕형 박사/서울신학대학교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9-11-21 11:59
조회
10

부흥의 희망과 해석학적 현실이해

이성봉의 회개의 인식론과 은총의 존재론

I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이것은 이 성봉 목사의 자서전의 서명이다. 그 책의 이름처럼 그분은 자신의 온 삶을 다하여서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을 증거 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비록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겪었으며 한 때 방탕한 세월을 지내기도 하였지만 병을 통하여 깨닫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입었다고 전한다. 그 후 그분의 삶은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리만큼 우리 한국의 대표적 부흥강사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신 것이다. 흔한 신학 서적하나 남기지 않으셨으며 그 어떤 철학적 업적으로 특출한 것은 없었지만 가난하고 절망적이었던 당시의 한국사회에 희망의 복음을 증거 하였으니 그의 공로는 가히 독일의 철인 G. Fichte의 그것에 못 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한 교파의 지도자 일 뿐만이 아니라 어둠과 절망 중에 있던 한국사회의 빛으로서 이 민족의 정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지하였던 것이다. 물론 당시 한국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이 목사님의 설교는 그들의 절박한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기원하는 현실적인 “부흥”을 주제로 한 것일 수 밖 에 없었다. 정인교 박사에 의하면 이성봉 목사의 설교는 전형적인 부흥설교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1)구원의 복음, 2)변화의 복음, 3)중생-성결-신유-재림의 성결 교회적 특성 4)위로와 희망의 복음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정박사의 분류에서 분명해 지듯이 그의 부흥설교는 그만큼 어려운 현실에 사는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며 부흥의 기대 역시 간절하게 만든다. 그의 설교 안에 들어있는 찬양의 가사와 예화들은 구구 절절히 어렵고 힘든 시절 부흥을 바라던 우리의 심령에 직접적인 호소를 하고 있는 것들이다.

당시 사회의 간절한 소원과도 일치하던 그의 설교의 주제가 실로 時宜適切하기도 하였지만 도탄에 빠져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설교가 그토록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던 것은 어떤 특별한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설교 안에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는 하나님의 현실을 증거 할 수 있었으며 많은 사람이 이를 체험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부흥집회에는 신유와 같은 기적적 사건이 있었는가 하면 동시에 고통받고 하나님 없이 시름하던 형제와 자매들의 해방의 사건이 있었고 영적 도덕적 갱신과 회복의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이 일차적이며 실제적인 사건은 성서의 말씀이 현실화되면서 주어진 것이었다. 성서에서 증거 된 그 하나님의 말씀이 당시 고통받던 형제와 자매들의 현실을 뚫고 자신들의 삶을 섭리 하에 있는 축복된 삶으로 이해하도록 만들었을 때 이 치유의 사실이 일어난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 변환을 우리는 하나님의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한 사람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이 대 변환이야말로 기실 그 어떤 철학적 인식론보다도 더 놀라운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설교의 주제인 부흥의 특성을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 약한 자를 치유하고 강하게 하는 것인 동시에 깨닫지 못하는 자를 각성케 하는 것이며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는 다시 참 부흥과 거짓 부흥을 나누고 거짓 부흥은 감상적인 부흥으로서 성결에 대한 아무런 관심과 죄에 대한 통회가 없는 것을 지적한 반면 참 부흥은 죄와 허물을 깨닫고 심령이 변화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부흥의 현실은 교회에 피를 부어주는 대 동맥과 같은 것으로서 사람들을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모시고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도록 만드는 현실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이성봉 목사의 부흥을 단순히 우리가 우리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사건으로 볼 뿐 아니라 우리를 규정하는 모든 세력들을 스스로 새롭게 규정할 수 있는 존재의 힘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게 한다. 이성봉 목사에 의하면 그 부흥의 첫 관문에 회개와 각성이 있는 것이며 이 전환은 인식론적 전환을 내포한 더 크고 놀라운 것이다.

이성봉 목사 그가 비록 신학적이며 철학적인 반성을 통하여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초 역사적 현실을 지칭하거나 해석하여 담아 낼만한 “언어-사건”을 주도 면밀하게 추구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부흥과 회개을 강조한 설교의 언어들을 통하여 이 전환을 성취하였다. 이성봉 목사의 설교를 통하여 구현된 신학적 실존의 공동적 체험은 이 세계, 비록 우리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반적 경험의 객관적 대상으로 인정되지는 못하지만 가장 구체적이며 중요한 현실인 것이다. 그의 설교와 그의 언어는 직접적이고 사건적 이지만 우리는 경험의 일차적 차원에서 사용되고 이해된 이성봉 목사의 언어를 반성적인 해석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즉, 이 새로운 세계에 이르기까지 이성봉 목사가 말씀해석과 설교의 수사학적 기교를 통하여 수행한 인식론적 전환과 하나님 말씀의 현실화는 분명한 신학적 반성의 대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이 분석과 해석을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이성봉 목사만이 아니라 많은 목회자들의 설교가 이 하나님의 현실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사람들이 필연적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인식론적 전환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인신론적 전환은 존재론적 지평에서 구체화되고 결국 우리는 새로운 현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여진 세계 앞에 서 있게 되며 간접적으로 사건적 특성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현실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의미를 규명 할 수 있는 것이다.

II

 

신학적 작업 안에서 우리가 해명하여야 할 중대한 과제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며 동시에 이 세계이다. 이 두 대상은 상이한 각 각의 대상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하나의 현실을 형성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를 구성하는 현실이란 개념을 우선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우리가 오늘 만나고 있는 현실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어떤 새로운 형이상학적 연구가 필요한 것인가? 현실이란 개념은 실은 고대의 존재나 중세의 실재(realitas)라는 개념을 통하여 사유되었던 것이다. 현실이란 개념이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현실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는 현재 실재하는 것이 그 실존의 모습 그대로 우리의 사고의 대상으로서 이해되는 사고의 대상이며 그 실재들은 우리의 사고의 대상의 범위와 영역을 넘어서 그 스스로 존재하면서 우리의 사고의 의미를 구성한다고 믿고 있지 않는가? 현대의 주관적 사유는 이렇게 주관과 객관의 이원론적 구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현대 정신과학의 기본 방법론으로 인정받는 해석학적 객관이란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관성의 전 이해를 통하여서 구성된 것을 말한다. 어떤 객관적 대상은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는 것 이라기 보다 이미 우리 주관적 사고와 협동적 영향아래 놓여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더욱 중요한 현대의 공헌은 이 현상이 개인의 실존적인 범주만이 아니라 존재론적 범주이기도 한 것을 밝힌 것이다. 즉 더 깊숙이 에는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그 자체로 객관적인 사고의 대상이 아니며 하나의 “생기”, 혹은 “발생”이라는 절대적 범주에서 통일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적이며 철학적인 현실이해는 이러한 “생성”으로서의 현실이해를 전제하고 있으며 그것은 다양한 언어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의 부흥설교에서 사건으로 일어났던 변혁적 현실은 실로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일상성을 뛰어넘는 미래적 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신학적인 개념을 통해 서술하고자 한다면 아마 몰트만이 특징적으로 사용하였던 “종말론적 현실”이란 개념과 가장 가까울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미래적 존재이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 현존의 근원이라고 실존적이며 존재론적으로 설명되기보다는 우리가 장차 되어져야 할 현존의 모습과 연관되어 있는 존재이며 그 미래를 결정짓는 존재이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존재의 비밀은 십자가에서 이 세계의 모순을 지양하는 변증법적 운동의 근원적 존재라는 데에 있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이 세계의 질서와 그 어떤 공통성을 가진 유비적 존재가 아니라 모순과 갈등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차이의 존재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세계 섭리의 계획은 다름 아니라 세계와 하나님의 존재사이의 차이와 모순의 지양이라는 변증법적 승화의 과정에서 드러나게 된다. 비록 이 하나님의 존재의 현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게 되는 그 구체적 계시의 현실에 대해서는 몰트만과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몰트만은 자기 나름대로 역사적 시간의 범주에서 이 구체성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몰트만이 생각한 변증법적 모순 지향의 특출한 역사는 전형적으로 신학적인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성봉 목사의 설교에서 구형화된 현실개념은 그 당시 한국의 사회가 당면하고 있던 모순과 비 존재의 갈등을 파괴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역설적으로 가져오게 하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봉 목사에게도 십자가는 대속의 사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내를 수반하는 변화의 외침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십자가는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심지어 개인적인 치욕과 부끄러움이라는 감정까지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이 세계를 변화시켜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이성봉 목사의 이 변화의 요구가 과연 세계사적 고난의 현실을 인지하고 그것을 뚫고 극복하고자 하는 현실적 언어인가 하는 점이다. 즉 거꾸로 그의 언어는 현실도피의 이중성을 보이고 있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속 시원하게 대답하여야 한다. 이성봉 목사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설교가운데 이 질문을 대답 할 수 있도록 하는 귀중한 설교가 있다. 다름아니라 천국에 대한 설교이다. 이 설교에서 그는 먼저 천국을 네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첫째는 심령의 천국이요 둘째는 교회라는 천국, 그리고 세 번째로 천년 왕국을 믿는 지상 천국을 지칭하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누릴 영생복락의 천국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천국의 시민으로서 우리 성도들은 이 세계에서 예언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별히 지상왕국의 천국을 믿는 관점은 전통주의가 그리스도의 삼대직무를 설명함에 있어서 그의 왕국을 영적인 현재의 교회와 장차 임할 영원복락의 나라의 왕권으로 상정하고 이를 다시 제사장과 예언자적 직무와 연관시켜서 그 연속성에서 생각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을 넘어서 현재 존재하는 영적 실재의 변증법적 현존을 더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왕국이 지금 현재 영적 다스림의 영역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한 다스림과 하나님의 은총으로 장차 성취될 것이라는 해석에 대하여 이미 천년운동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모순 지양의 변증법적 실체가 주장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을 포함한 전통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통하여 우리의 현실을 해석하는 과정보다도 이성봉 목사의 부흥설교에는 이 현존이 실재적인 사건으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의 부흥 설교를 통하여 우리가 체험하였던 영적 임재의 현실은 현실을 수용하고 그것을 새롭게 변화시켜 나가게 만드는 동인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 몰트만의 종말론적 현실이라는 특정한 이해는 형이상학의 전통을 배후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현실과 이상사이의 역설의 계기를 존재의 원형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특별히 역사 안에서 존재의 근원적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긴 철학적 이념의 발전을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이다. 고전적인 헬라철학에서는 현실이라는 개념을 주로 “존재”라는 개념으로 대치하여 생각하였고 이때 존재란 주로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한정되었으며 이와 반대로 “변화하거나”, “운동하는 것”은 비 존재 혹은 비 실재로서 각인 되었다. 일찍이 서양사상의 뿌리로 인식되는 플라톤 사상의 초자연적인 실체로서 이데아에 대한 이론은 이와 같은 특징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플라톤이 제시한 그 이데아 이론은 정치적이며 도덕적 가치를 확고하게 하고자 하는 소위 정신과학적 탐구의 방법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그 범위를 넓혀 나에게 참된 것으로 인정되는 모든 사상(事狀)의 대상을 탐구하는 존재론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에게 이 이데아는 모든 경험적인 것을 초월한 절대적인 존재의 성격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Parmenides의 사고의 법칙에 깊히 연관되어 있다는 구체적 증거이기도 하지만 더 깊숙이는 고대 동방 종교의 신학적 지식의 관철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초월을 중심으로 지금 현재의 존재자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한 플라톤적 사유가 있었는가 하면 이를 대신하여 존재의 내재성 중심의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현실이란 개념을 “한 개체 안에 놓여져 있는 가능성을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즉 현실이란 개념은 “각 개체 안에 질료적 성격과 구분된 형상”으로서의 “개체의 완전성의 원리(das Prinzip der Vollendung)”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론은 그 존재는 구체적인 각 개별자와 구분되지 않은 채 그 개별자 자체 안에서 내포된 영원한 내적 동인이요 동시에 그 개별자가 되어야 할 내적 목적으로 사유된 것이며 동시에 이 세계자체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미래의 발전을 위하여 개방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존재론의 특성은 모든 역사의 내적 존재자들이 그 자체로서 초월을 향한 암호가 될 수 있는 특별한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모든 존재의 기본 성격은 경험적이며 서술적이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본래적 지평을 열 수 있게 된 것이다. 새로운 인식의 전환에 의하여 서구 형이상학의 탄생은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 두 사상가들의 터 닦음 위에 서구의 정신은 모순과 갈등, 그리고 무와 같은 부정적 계기들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하기 시작하였고 이 작업을 근대에 이르러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상가는 다름아니라 헤겔인 것이다: 자신의 법철학에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고 선명하게 이 존재의 역동적 계기를 모순의 변증법적 지양이라는 법칙으로서 설명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의 정신 현상학의 구체적 완성을 국가라는 정치적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헤겔의 현실 개념을 관념적인 것으로 비판하였던 맑스와 엥겔스는 대 부분의 사람들이 이제는 상식의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중심의 존재개념을 형성하였던 것이며 이 유물론의 기본 전제에 다시 성서적 종말론,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유대 묵시문학의 최후의 것에 대한 대망을 불어넣어 관념주의적 메시야주의로 변모시킨 에른스트 불로흐의 통찰을 통하여 이 모순과 갈등의 변증법적 지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 안에서 신학화 함으로써 몰트만은 우리에게 신학적 현실개념을 눈에 띄게 명료하게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간략하게 설명된 것처럼 서구 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 텔레스의 철학적 중심은 언제나 인간 지식의 회의와 질문으로부터 야기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참된 지식은 무엇인가? 라는 인식론적 탐구의 결실을 현실의 세계를 넘어선 새로운 사유의 범주가운데 찾게 된 것이다. 특별히 플라톤의 초월적 동기에서 분명하게 보이듯이 현재의 경험적 세계를 넘어서는 실제적인 세계를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 모든 철학적 인식은 나름대로의 변증법과 가설을 통한 사유의 법칙을 찾게되었던 것이고 또 필요로 하는 것이다. 존재를 존재론적으로 반성하며 인식론적으로 바르게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철학적 사유는 언제나 현존하는 경험세계의 인식적, 존재적 특성을 넘어서 반성적 차원에서 해석된 새로운 차원의 실제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몰트만의 신학적 현실 개념이 형이상학적 전통의 신학적 변형이라고 보아서는 안되고 거꾸로 신학적 개념이 형이상학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는 면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즉, 몰트만의 “신학적 현실”이라는 그 신학적 개념자체가 폭발적 위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개념의 올바른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가능하여진 부흥과 해방의 새로운 현실을 위한 도구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이성봉 목사의 현실 개념은 이와 같은 철학적 배경을 전제로 사유하고 설교하지는 못하였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에서 현실화된 변혁의 사건은 나름대로 존재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나름대로 존재의 형이상학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야 할 당위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성봉 목사가 부르짖었던 설교와 그 설교를 잉태하고 현실화 한 성령의 능력가운데 그 원초적 기원을 찾아야 하지만 크게 보아 그의 설교는 당시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어 한국의 평양 장대현 교회에 있었던 부흥운동의 연장선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현실개념이 20세기 초 미국에서 번져나갔던 자유주의 신학의 천년왕국에 대한 비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낙관적이며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가운데 성장한 자유주의의 역사에 이해를 대신하여 묵시적 천년 왕국의 동기 안에서 이성봉의 부흥운동을 본다면 이성봉의 설교에서 구체화된 현실개념들은 몰트만의 그것과 같이 새로운 역동적 형이상학적 모델 하에서 이해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성령의 현실로서 가능하여 진 이 현실과 실재의 개념은 그럼으로 우리가 오늘날 경험하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현실개념을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는 존재 그 자체의 근본 성격에 더 접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기성의 철학적 반성의 언어로서 존재가 아니라 새로움의 창조로서 존재의 언어를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보편적 지평에서 사유하는 철학적 존재개념보다 더 철저한 현실과 존재의 비판이 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존재의 역사는 다름아니라 존재를 받아들이고 수용한 형이상학의 역사이기도 한 바 우리는 이성봉 목사가 촉구하고 있는 회개의 현실 개념이 철학과의 존재론적 논쟁을 통하여 여타 다른 철학적 개념들 속에서 오히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초월의 영역을 드러내는 인식론적 전환의 계기들을 찾을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그 작업을 통하여 긴 형이상학의 역사를 자신의 설교 속에서 내재시키면서 절대 초월을 향한 자신의 고유한 신학적 현실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III

 

 

우리는 형이상학의 여정의 한 현대적 시도를 통하여 이성봉 목사의 현실개념이 그의 부흥설교의 텍스트이해와 연관이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이성봉 목사의 현실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서 리꾀르와의 만남이 중요하다. 그 까닭은 첫째 이성봉 목사가 구체화시킬 수 있었던 하나님 나라의 현실은 그 해당본문과 독자(청자)인 나의 주체적 삶의 두 이중성에서 그 둘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을 통하여 하나의 독특한 현실개념을 형성하게 하였기 때문이며 둘째, 리꾀르의 공헌 중 가장 큰 것이 다름아니라 성서 본문의 독자성의 확립과 더불어 성서와 나의 독자의 현실의 상황이라는 두 상이한 본문들이 서로 하나로 융합하며 통합되는 그 구체적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인 현실화의 과정을 해석학적 현실로서 표명 할 수 있도록 한 점에 있으며 이는 성서적 이해가 우리에게 구체화되는 가장 적절한 길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리꾀르에게 해석학적 반성을 통하여 명료하게 표현되었던 해석학적 현실의 구체적인 예로서 우리는 이성봉 목사의 “천로역정 강화”를 들을 수 있다. 그의 부흥회에 참여하여 이 천로역정 강화를 들었던 분들의 한결같은 보고는 그 이야기를 통하여 이성봉 목사는 먼저 성서 본문의 지평을 그 천로역정의 이야기와 연합하여 하나의 동일한 지평으로 내 세우는 가 하면 동시에 그 청취자나 독자에게 다시 한번 그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현실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기독자의 현실에 투사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자의 삶이 자신의 삶의 규범적 기능을 하도록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향한 결단을 통하여 지금의 현실을 새롭게 구성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단지 가다머의 지평융합의 차원을 떠나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 지도적인 이념으로 등장하도록 양자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줌으로서 이루어진 결단인 것이다. 즉 이성봉 목사의 설교의 이해의 성취 여부는 다름 아니라 이 간 본문중심의 현실의 구성여부에 따라 결정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가 리꾀르의 해석학적 반성을 살펴보면서 암시적으로 이성봉 목사에게 있었던 해석학적 반성의 결과를 추론해 보고자 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요 그 해석학적 현실의 한 단면을 밝히는 일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리꾀르는 본인의 해석학적 통찰을 진행시키면서 암시적으로 새로운 현실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게 된다. 리꾀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지금까지 철학계를 양분하다시피 한 해석학과 비판학의 통찰을 하나로 연관시키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단 그는 이 양자를 묵을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meta-thorie를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의 특성과 개성을 새로운 의미에서 조명할 수 있는 어떤 개념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자연스럽게 해석학과 비판학이 전제로 하고 있을 실체의 정의를 다시 정립하고 이를 새롭게 이해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리꾀르의 실재개념은 그가 먼저 가다머의 해석학을 비평적으로 수용하면서 그 해석학적 대상의 보편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리꾀르에 의하면 가다머가 갖고 있는 해석학적 통찰은 두 전통의 극복의 형태로 주어진다: 낭만주의적 해석학은 자신의 특징대로 언제나 과거에 대한 향수를 가진 채 과거와 현대의 연속성의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이에 반해서 계몽주의는 이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 위에서만 가능한 모든 인간의 판단의 전제를 무시하고 그저 바름의 일면만을 강조한 것이다. 가다머가 이 두 전통의 굴절된 모습을 극복하는 것은 리꾀르에 의하면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통찰, 즉 이해의 시간적 구조를 해명하는 것을 통하여서 가능하여졌다. 가다머는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에서의 “현(Da)”의 문제와 현존재의 전체성의 개념을 시간성(Zeitlichkeit)의 개념에서 분석하고 난 뒤 오해의 존재론과 전승사 그리고 그 전승의 올바른 비평의 이론을 차례로 다루었고 그를 통하여 자신을 기존의 해석학과 구분할 수 있었다. 즉 기존의 이성과는 색다른 모습을 가진 “오해(Vorurteile)” 내지 “이해의 선행적 구조(Vorstructure des Verstehens)”의 존재론적 의미를 해석학적으로 재확인하고 그것의 인식론적 의미를 개별 과학적 특성인 ”비판의 정신“ 속에서 재해석하려고 한 점에서 가다머의 해석학적 통찰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가다머에 의하면 오해는 그 어떤 범주보다도 더 사실적으로 한 개별적 존재자의 역사적 실재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리꾀르가 보기에 가다머는 이 과정에서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철학의 동기를 수정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그의 초기저서인 “존재와 시간”에서 모든 해석학적 근본 문제로서 제기한 이해의 존재론은 인식론적 질문을 존재론적 근거에서 풀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통찰(존재-그자체, 행재로서의 존재, 혹은 존재라는 단어의 생략적 행위등)이 어떻게 인식론적으로 다시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는지 그 해설을 소홀히 하였으며 가다머는 바로 그 점을 수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서 “선-이해적 규정(Vor-Verständnis)”인 “오해(Vorurteile)”는 다름 아니라 이 기본적 존재론적 구조가 인식론적 진리로 환원될 때 사용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와 상관이 있는 것이다: 가다머는 자신의 철학의 특징적 범주인 ”오해“, 혹은 “전이해“를 방법론적 반성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오해의 범주가 드러내는 현실은 무엇인가? 리꾀르에 의하면 가다머는 더 이상 낭만주의자들과 같이 그 본문 안에 숨어 있는 어떤 신비한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문이 독자와의 상관관계에서 펼쳐지고 새롭게 개방되면서 주어지는 세계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리꾀르는 이러한 그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를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가다머를 비판한 베티와는 달리 리꾀르는 가다머의 해석학이 존재론적 지평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증한 편이며 그를 통하여 해석학적 이해의 지평이 존재지평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리꾀르가 추구하는 현실은 독자의 현실의 역사와 더불어서 그 본문이 새롭게 열어주는 의미의 개방적 현실이다. 그것도 원문의 해석을 위한 비판적 적용을 통하여 원 본문의 상황과 독자의 상황사이의 차이가 의미획득을 위한 구체성으로 작용하도록 하는 해석학적 차이가 중요한 과정인 것이다. 특별히 가다머와 달리 리꾀르에게 있어서 이 차이의 과정은 원 본문이 우리 독자의 극단적 한계상황을 나타나게 함으로서 본래적 초월성을 새롭게 얻게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즉 그에 의하면 이 새롭게 얻어지는 해석학적 현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해 온 지금까지의 경험을 폭발적으로 뚫고 새로움으로 채우는 하나님의 현실인 것이다.

둘째로 리꼬르가 제시하고자 하는 이해의 특징은 간 주관적 구성의 요소를 상호간의 차이가운데서 찾는 것이다. 가다머의 철학사적 위치가 하이데거 철학의 주요관점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시 극복하려는 연장선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꾀르가 보기에 가다머는 아직도 독일의 낭만주의 전통 위에 서 있다. 과거와 역사의 전통의 권위가 적극적으로 인정되고 이해되는 관점으로부터만 소위 “영양사(Wirkungsgeschichte)” 와 ”지평융합 (Horizont-Verschmelzung)“이라는 범주가 이해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보다 폭넓은 그의 우주론적 지평설정에도 불구하고 리꾀르에 의하면 가다머의 핵심적 사유의 단초는 여전히 개인의 주관적 범주와 깊히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은 역사성인 것이다. 그럼으로 리꾀르는 가다머의 철학을 그 핵심개념들이 가질수 있던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으로부터 그 개념들을 새롭게 이해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일찍이 가다머는 이 개인의 역사성의 범주를 통하여 자신의 해석학을 유한성의 철학의 특징을 갖도록 하였다. 즉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존재의 이해는 언제나 특정한 역사의 영향아래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통찰을 유지하면서 이 유한성이 단순히 우리의 이해의 제한적 역할을 하는 어떤 것만이 아니라 일종의 영향사적 특성을 띈 채 그 역사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초월적 지평으로 영역을 확대해 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리꾀르는 이 지평을 한 역사의 구체적 사실들이 타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개방적인 의식의 세계“로서 이해한다. 이 개방성이란 타자의 타자성이 인정되는 개방성이고 그 개방성이 의식된 의식의 존재는 “영향사(Wirkungsgeschichte)”의 구체적 모습이며 그를 통하여 역사적 유한성의 현실을 이어주는 근본적 일치를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리꾀르가 보기에 가다머의 해석학이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유한성을 넘어서는 근본적 일치의 특성은 지평융합(Horizont-Verschmelzung)이라는 완성된 입장이 아니라 그것의 구체적 전개과정을 통하여서 더 과학적으로 분석되어야 할 과정 중에 있는 대상이다. 즉 관념론적 입장에서 초-역사적 지평을 구성해서는 안되고 그 대신 개별 과학에서 요구되는 정교성을 갖고 새로운 의미를 각 개체적 현실 속에서 구성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평융합은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적 거리(Historische Distanz)라는 한 살아 있는 역사의 현실내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차이의 의식이 뚜렷할수록 그 역사의 의미는 풍성하여 지는 것이다. 리꾀르는 이러한 관점에서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그 전체성 배후에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된 구조주의적 한계를 극복하고 살아 있는 역동적 현실을 추구하고자 한다. 즉 역사주의의 현실적 개념을 반대하는 동시에 구조주의가 여전히 어떤 초-구조로서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덧 붙혀 리꾀르는 가다머의 지평융합의 일치성은 해석학의 참된 본성을 단절시킬 수도 있음을 고발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본문의 세계는 나에 대한 타자로서 그 본문 안에서 특별히 성서의 초월적 동기인 하나님의 나라의 초월적 타자성은 나의 현실의 구성적 지평을 제어하는 기준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리꾀르가 보고자 하는 이 본문들 간의 융합을 통한 현실은 해석하여야 할 본문의 결정적 내용에 의한 현실인 것이다.

세 번째로 리꾀르가 보기에 가다머가 자신의 사유의 근본적 원천으로 삼았던 보편성의 최후의 근거는 “언어”였다. 가다머가 이 언어의 지평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의 구체적인 모습을 발견하였듯이 리꾀르는 담화(Discourse)라는 언어의 본래적 지평에서 이해의 근원을 찾는다; 그리고 담화가 구체적으로 풀어야 할 해석학적 현실개념은 본문의 상황과 깊은 연관관계에 있다. 리꾀르는 자신의 해석학적 보편성이 추구하는 실재가 낭만주의와 구조주의적 개념으로서는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는 “본문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다. 즉 구조나 한 주관적 개인의 실존적 역사성이 아닌 실체적 경험을 구성하는 범주는 “본문”과 “본문의 주석”이어야 했던 것이다. 리꾀르가 언어와 연관된 세계를 이 본문의 세계에서 이해함으로써 지금까지의 해석학은 전혀 새로운 사유의 원천을 이어받게 된다: 그것은 “차이와 타자성의 인식”에서 해석학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특질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리꾀르에게는 언어-행동이론의 Searle이 모범적인 대화상대자로 있었으며 적극적인 언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즉 그의 해석행위는 철저하게 언어적 활용의 상황이었으며 우리가 구체적으로 직면하는 현실에서의 진리인식의 구성적 측면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가다머의 해석학과의 차이를 통하여 암시적으로 리꾀르의 해석학적 현실이해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우리는 이런 현실의 구체적 사건이 이성봉 목사의 설교의 현장이었으며 그가 추구하는 부흥신학의 존재론적 현실이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밝혀지는 것은 비록 이성봉 목사가 구체화시키지는 않았지만 리꾀르가 말하는 새로운 현실이 그의 이해의 과정에서 드러난 하나의 구체적 현실인 것처럼 이성봉 목사에게서는 그 설교의 현실을 구현하는 힘과 해석의 지평이 현실을 극복하는 현실 구성적 요소임을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V

 

이성봉 목사의 설교 안에 나타난 현실과 그 인식의 방도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철두철미하게 변증법적인 역동성과 함께 본문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는 해석학적 철저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이해가 비록 암시적이나마 하나의 방법적이며 구체적인 통로를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하여 생각하여 왔다: 철학적이며 반성적인 언어로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신앙의 현실적 언어 속에서 회개와 더불어 주어지는 새로움의 현실의 역동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성봉의 현실개념은 철저하게 먼저 회개의 대 각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각성의 신학적 의미를 앞에서 이미 강조한 바 있지만 우리의 과제는 그가 과연 이 각성이 현존하는 세계를 변혁의 기회로 보기까지 어떤 투철한 신학적 반성을 거쳤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이 세계와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동시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회개의 인식론은 일반적 이해의 근원인 역사의 안으로부터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 바깥으로부터 사유하는 새로운 관점이다. 이 유한성의 인식은 무한성이 유한한 것에 접근하면서 생기는 감정의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며 일상성의 허무함이 바로 그것이었다. 즉 그는 이 세속적인 세계의 이중성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회개의 철저한 변화의 사건이 지금까지의 세계를 무상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 변화된 세계는 무가치한 것은 아니라 회개의 실현의 기회이며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의 새로운 변혁의 장소로 변모된 것이다.

이성봉 목사의 현실이해의 또 하나의 특징은 회개의 순간 주어지는 인간의 자기이해와 더불어서 회개한 성도가 만나는 현실의 구성적 성격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현실은 변화될 수 있는 것이며 미래의 새로움에 대한 기대는 언제나 열려있는 것이다. 회개와 더불어 주어지는 현실은 돌연한 새로움의 현실로서 하나님의 현실이 규범적 역할을 하는 참여의 허락이었다. 사실 세계의 이중성에 대한 이성봉 목사의 표현은 종말론적 음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당시 한국의 성결교회에서 이해하던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교리적 현실을 넘어서 성서적 천년왕국의 희망을 현실화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모든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 뒤에 있으므로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참여의 길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미 그 하나님의 현실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 참여는 우리에게 현실의 개방성과 구성력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참여가 다름 아니라 리꾀르가 밝히고자 한 간-본문의 새로운 현실구성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는 실로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현실을 만나게 됨을 체험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우리가 요구하는 부흥은 회개를 통한 하나님의 현실을 체험하는 데에 있으며 모든 신학의 사명은 이 체험을 반성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전체 11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11
이성봉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좌담회 – 성결회관 회의실
admin | 2019.11.21 | 추천 0 | 조회 8
admin 2019.11.21 0 8
10
부흥의 희망과 해석학적 현실이해(이성봉의 회개의 인식론과 은총의 존재론) – 황덕형 박사/서울신학대학교
admin | 2019.11.21 | 추천 0 | 조회 10
admin 2019.11.21 0 10
9
이성봉의 성서 해석학 수립을 위한 하나의 전진 – 윤철원 교수/서울신학대학교
admin | 2019.11.21 | 추천 0 | 조회 5
admin 2019.11.21 0 5
8
이성봉 설교의 수사학(이성봉 목사의 부흥설교에 대한 수사학적 조명과 분석) – 정인교 교수/서울신학대학교
admin | 2019.11.21 | 추천 0 | 조회 7
admin 2019.11.21 0 7
7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 정인교 교수/서울신학대학교
admin | 2019.11.21 | 추천 0 | 조회 5
admin 2019.11.21 0 5
6
이야기 신학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 이상직 목사/호서대 부총장/호서대 명예교수
admin | 2019.11.21 | 추천 0 | 조회 6
admin 2019.11.21 0 6
5
목회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 송기식 목사/수원교회
admin | 2019.11.21 | 추천 0 | 조회 6
admin 2019.11.21 0 6
4
이성봉 목사 부흥사역의 특징 – 강근환 목사/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admin | 2019.11.21 | 추천 0 | 조회 4
admin 2019.11.21 0 4
3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 – 김명혁 강변교회 담임목사/합동신학대학원 겸임교수
admin | 2019.11.21 | 추천 0 | 조회 6
admin 2019.11.21 0 6
2
이성봉 목사의 부흥운동 재조명 – 민경배 전연세대 교수
admin | 2019.11.21 | 추천 0 | 조회 6
admin 2019.11.21 0 6
1
내가 본 이성봉 목사님 – 신촌성결교회 고 정진경 원로목사
admin | 2019.11.21 | 추천 0 | 조회 6
admin 2019.11.21 0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