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SungBong Mission​
주님의 품에 안기신 고 이성봉 목사님의 뜻을 이어받아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1965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 실천적 사명을 이어온 선교회입니다.
선봉선교회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죽도록 충성하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0)
목사님 소개
사랑을 전하는 목회자로 복음을 전하는 부흥사로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오늘날 너로‥‥‥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아멘."
목사님 생애와 사상
고 이성봉 목사님의 발자취는 주님께서 항상 동행하셨습니다.
성신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얻고 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행 1 : 8),
나의 갈 길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할 일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할 말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먹을 것조차 나는 알지 못한다.

오직 주님께 바친 몸 그의 능력의 손에 붙잡혀 신앙생활 사십 년간에 부흥 사명이 임한 지 이십삼 년 동안 한국 각지로, 일본으로, 만주 등지로 전도 여행하며 지난 자취를 회고해 보면 신기하고 오묘하신 주님의 섭리와 경륜을 다 측량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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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Bong Mission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생애와 사상

—–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자서전> —–

한국교회의 영적 각성과 부흥운동에 지 대한 영향을 끼친 이성봉목사의 생애와 사상을 이성봉목사의 자서전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를 구성되어 있으며 생애와 사상을 총 19가지로 설명했고 책으로 모두 표현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한 목회자의 열정적이고 감동적인 삶을 통해 선교의 비전과 믿음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책이갖는 최대 매력이다.

지금까지 이성봉 목사에 관한 학술 논문이나 설교집 등 다양한 서적은 출판되었지만 만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사실 그동안 이목사의 신앙과 신학을 재조망하는 학술행사 세미나가 이어졌으며, 관련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일반 대중과 젊은 층에게 알리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쉽고 평이한 이야기설교와 재치 있는 예화로 기독교의 진리를 일반 대중에게 쉽게 전했던 이성봉목사의 삶과 신앙이 정작 일반 대중들에게 폭넓게 알려질 만한 통로가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출판된 ‘만화 이성봉목사’ 는 이러한 갈증을 단숨에 해결한다. 만화 속에 묻어 나는 이목사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한 후 14살 때 키작은 것을 이용해 반표로 기차를 탔던 것을 기억하고 당시 중화역장에게 그때의 잘못을고백하며 요금의 4배를 넣어서 붙였던 이야기는 잔잔한 웃음과 감동을 선사한다. 또한 일제와 공산군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대목에서는 호쾌한 무용담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만주벌판과 땅끝 해남, 멀리 해외에 이르기까지 사도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는 열정적인 전도와 그때마다 일어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어 읽는 사람의 믿음을 증진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 책을 펴면 끝까지 눈을 떼지 않고 단숨에 읽을 수 있다. 또 쉬우면서도 복음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선교의 비전을 심어주며, 진정한 목회자의 삶을 본받을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 아이에서 어른에게 이르기까지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이 갖는 장점이다.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란 명언을 남긴 이성봉목사는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뒤 수원 목포 신의주교회를 거쳐 만주지역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후 이북에서 성결교회재건운동을 펼쳤다. 61s63년 사이에만 무려 408개 교회를 순회했다. 특히 쉬우면서도 역동적인 설교로 많은 영혼들을 구원했으며, 한국의 무디로 불릴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부흥운동가로 손꼽히고 있다.

목포교회 시대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9-11-20 15:02
조회
16
목포교회는 장석초 목사가 개척한 후 압해도 섬으로 가고 그 후에 김응조 목사가 후임이었는데 대전에 감리사로 가고 내가 그 뒤를 맡은 곳이었다.

자그만한 셋방에 전도는 불과 사오십 명밖에 안 된 곳이었다. 가는 즉시로 전도 지대가 넓어 일할 만한 곳임을 확신하고 결사적으로 달려들었다. 만나는 대로 개인 전도와 심방 그리고 가정집회, 구역 집회 등등 하루도 쉴 새 없이 활동하였다. 특히 청신(靑信) 기도단을 조직하여 새벽 밝기 전에 수십 명의 청년들과 같이 유달산에 올라가 기도와 찬송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때의 기도 목적은 예배당 건축이었다.

"죄 있는 장소, 불의한 집, 개인의 집은 좋은 집이 많은데 주님의 성전이 셋집이라니 웬말인가? "

사실 예배당이 좁고 좁아서 증축을 세 번씩이나 했으나 그래도 좁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는 기도만 할 뿐 아니라 모든 물질과 육체를 다 바쳤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일년만에 응답하사 좋은 기지를 사고 뜻밖에도 미국의 어떤 성도를 통하여 풍성한 물질을 보내 주시어 석조전 48평, 다락까지 하면 50여 평의 훌륭한 교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청부업자가 유달산에서 돌을 깨뜨려다가 성전을 건축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우리 기도단이 올라가서 기도하던 그곳의 돌을 깨뜨려다가 지은 것이었다. 그들은 그 사실들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때에 나는 기도하면 바윗돌도 깨어진다는 것을 한번 더 체험했었다.

내가 삼십 세 때 목사 아닌 목사 행세를 한 적이 있었다. 신학생 때부터 부흥사 소질이 있어서 때때로 작은 교회를 비롯하여 큰 교회에 이르기까지 부흥회를 많이 인도하였다. 한번은 광주중앙 장로교회에서 전도사인 나를 부흥사로 초청하였다. 나는 주저없이 주님의 능력을 믿고 삼십 세의 어린 사람으로 강사가 되어 갔었다. 거기에서는 나를 목사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목사가 아니라고 하니 대단히 곤란한 모양이었다.

그 교회 목사님은 그래도 목사로 알고 광고를 했으니 목사 행세를 하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축도만 하지 않기로 하고 목사의 이름으로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목사 안수받기 전부터 목사 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어린 다윗을 들어 골리앗의 머리를 쳐부순 것처럼 청년 전도사를 주님은 붙드사 광주 일대에 큰 부흥을 일으키셨다. 그때 많은 헌금이 나와서 교회를 신축하게 되었고 지금은 일류 가는 교회가 되었다.

그 후 나는 32세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33세에 또 딸을 하나 얻었다. 이름을 원숙이라고 지었다. 음악에 소질이 있기에 이대 음악과를 보냈더니 몸이 약해서 중도에 그만두고 서울 신학교를 마친 박일철군과 결혼하였다.

둘째 사위 박군은 이북에서 16세에 혼자 월남하여 38선 때문에 부모와 이별하고 내내 고학으로 서울 신학교까지 졸업하였다. 믿음이 좋고 의지가 굳어 나의 성격에 잘 맞으며 기대가 매우 컸다. 현재 군목으로 주의 일을 돕고 있다(지금은 미국 템플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의 교수로 있다).

목포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시험이 일어났다. 교회 안에서는 부흥이 되어 모두 열심들인데 외부의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핍박이 많았다. 새벽마다 종 친다고 옆에 있는 군청 직원들이 경찰에 고발하고 또 신문사와 잡지사에서는 "목사는 연애 박사인가"라는 제목으로 터무니없이 뒤집어씌웠다.

내용인즉 모 신문사 사장의 소실이 교회 나와 은혜받고 보니 죄악의 자리에 하루라도 더 있을 수 없어서 결국 그 집에서 나오고 말았다. 그래서 교회 목사가 남의 가정을 파괴시켰다는 신문내용이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청년 한 사람이 베드로 같은 성질을 가지고 그 기사를 낸 신문 기자에게 "왜 우리 교회 목사를 무근지설(無根之說)로 모략 중상하느냐? 취소하라"고 하며 그를 때렸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그 청년에게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나를 괴롭히는 일만 하는구나" 하고 책망했다. 그 후 경찰에서 호출이 왔다. 신문 기자가 경찰에다가 "목사가 신자들을 충동하여 나를 구타했다"고 고소하였다. 그저 나는 묵묵히 주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많은 모욕을 관민들 앞에서 다 당하였다. 경찰서에서 기도를 했더니 "저것 보라. 경찰서 안에서 기도하는 꼴 보라" 하며 모두 조롱을 하고 욕을 보였다.

또 한번은 나를 극진히 사랑한다는 청년 몇몇이 합작하여 나를 축출하려고 적극적으로 활동한 일이 있었다. 그 이유는 부인 집사네 집에 가서 과일을 얻어먹었다는 것과 설교에서 너무 죄를 공격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 그리고 여러 가지 있는 일 없는 일, 모두 모아서 서류를 작성하여 총회 본부에 고소하였다. 그러나 상부에서 내려와 조사해 보니 아무 일 없는 것들이라 잘 해결되고 말았다.

그 후로 그만 몇 명의 청년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그 중에 교회에서 제일 말썽이던 한 청년은 무서운 병마에 시달리게 되었다. 나는 그를 찾아가 위로하고 기도하여 주었다. 그는 마지막 회개를 하였으나 다시 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때는 부인들이 동맹을 하고 목사 배척을 하는데, 이유는 우리 교회의 여전도사를 본부에서 다른 곳으로 전근시킨 것은 목사의 책임이라고 하며 교회도 나오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나는 꾹 참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는데 그 후 그들은 다 회개하고 돌아와 전보다 더욱 교회와 목사를 사랑하게 되었다. 또 한번은 지극히 사랑하는 가정에서 배척을 받았던 것이다. 그 부인의 신앙이 점점 신비주의로 나아가 탈선의 걸음을 걷기에 몇 번 충고하였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므로 교회에서 책벌하였다. 그랬더니 그의 아들이 나를 찾아와서 끌어내어 수없이 폭행을 하고 갖은 모욕을 다 주었다. 그러나 끝까지 참음으로써 승리했다. 그 후에 그 가정은 생활이 비참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어려운 일도 많이 당하였으나 반대로 좋은 일꾼도 많이 생기었다. 그 교회 열매로는 김정기 목사, 이진우 목사, 김신근 목사, 차보근 목사, 염숙정 여전도사 등 현재 많은 일꾼들이 있다.

그리고 또한 중매도 많이 하여 이두종 장로, 손용구 장로, 양병진 집사, 성주채 집사, 김영진, 그 외에도 십여 쌍 결혼을 시켰는데 거의 다 자손 창성하고 부귀도 누리고 교회에도 잘 봉사하여 목사, 장로, 집사로 충성하니 다행이로다.

또한 목포교회에서의 6년간 목회 생활에 많은 지교회를 세웠다.

1. 암태 교회

암태도는 발동선을 타면 약 두 시간 반쯤 걸리는 섬이다. 이 곳에 사는 김흥기라는 청년이 목포에 공부하러 왔다가 예수 믿고 고향 섬에 돌아가 전도하게 되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그곳에 교회를 설립하고 많은 영혼을 구원하였다. 지금은 그 섬에 교회가 다섯 곳이나 설립되었다 한다.

2. 임자도 교회

이 섬 진마을이라는 곳에 전도하여 지금은 너덧 군데나 교회가 서게 되었다. 특히 공산당 시대에 약 40명 가량의 교인들이 순교당하였다. 순교자의 피가 복음의 씨가 되어 이곳의 교회는 더욱 힘있게 자라고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판일 장로의 13식구는 모두 한 구덩이에서 참살을 당하였다.

3. 후증도 교회

이 섬에는 문준경 여전도사의 전도로 근방 섬 교회 중에 제일 큰 교회가 생겼고 그로 인하여 그 섬에도 교회가 두세 군데나 서게 되었다. 문준경 여전도사는 6·25 때 공산당에게 학살당하였다. 그의 열매로 전도사와 목사가 십여 명 생기었다.

4. 압해도 교회

이 섬에는 그 전부터 교회가 있었으나 매우 약하였다. 몇 곳에 더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많은 신도들을 얻고 전도사들이 생기었다.

이 외에 임성과 목포시에도 교회를 세 곳이나 더 세웠다. 한 가지 안 된 것은 참 진실하고 신앙 좋던 김형호라는 노인 집사가 그렇게 교회에 잘 봉사하더니 그만 안식교의 유혹을 받아 이단지도에 끌리어 가서 나중에는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된 것이다. 그 노인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심히 안타깝다.

"사랑은 자기 건설이요, 미움은 자기 파괴라. 죄 값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는 영생이라. 삼가서 사람에게 미혹을 받지 말지어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죄의 유혹됨을 면할지어다. "

내가 35세 때 본 성결교단에 큰 불상사가 일어났다. 본 성결 교단은 감독제라서 백인들이 금전의 권리를 가지고 감독정치로 교회를 망친다는 것과 몇 사람이 백인들에게 아부하여 지방 그룹을 지어 차별한다는 것으로 인해서 말썽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서도(서도, 평안도·황해도)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나는 본래 성질이 치우치는 것을 싫어하고 더욱이 지방 관념을 죄악시하였기 때문에 거기에 상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평양 사람이면서도 서도 사람들에게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회색분자라는 좋지 못한 말도 들었다. 물론 단체 혁명 정신은 좋았으나 그 방법이 온건치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나아가면 주께서 해주실 것이지 인간의 수단 방법을 가지고 베드로가 칼을 뽑아들 듯이 일을 하면 안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총회 때에 일은 벌어져 본부 측과 혁신 측의 분쟁 끝에 영영 두 파로 나누이고 말았다. 그 당시에는 본부 측의 책임이 매우 큰 것이었다. 그래서 혁신 측에서는 따로 하나님의 교회 간판을 붙이고 독립교회로서 운영해 나아갔으나 현재 부진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때에 나는 불평, 불만, 원망, 시비는 마귀의 시험인 줄 알았다.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하리라" 하신 말씀과 "다른 사람의 불의한 일을 가지고 불평하지 말라. 죄에만 빠지리라" 하신 말씀이 생각났으며 주님의 말씀이 참 진리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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